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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급 국가직 한국사

2016 국가직 7급 한국사 1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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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국가직 7급 한국사 11번 보겠습니다.

 

 

11. 1930년 이후 전개된 해외 독립운동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홍진, 이청천 등이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을 발족하였다. ② 임시정부가 국무위원 중심제를 채택하고자 개헌하였다. ③ 조선혁명군이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④ 태항산 지역에서 조선의용군이 팔로군과 협동작전을 벌였다.






해설

답은 2번입니다.

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통합의 기류는 만주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통합되어 남만주 지역을 중심으로한 국민부(정치 : 조선혁명당, 군사 : 조선혁명군)와 북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혁신의회(정치 : 한국독립당, 군사 : 한국독립군)가 생겨 납니다.


1931년에 터진 만주사변과 1932년에 수립된 만주국으로 인해서 만주에 있던 중국인들 또한 각성하게 됩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이기 전이었던 1920년대에는 중국인들은 우리의 적이기도 하였으나 1930년대들어 직접 침략을 받게 되자 우리와 연합하여 일제와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흥경성, 시개령 전투에서 승리하고 일본육사출신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사도하자, 동경성, 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양세봉이 중국인에게 암살 당하고 전리품 분배문제등을 두고 한국군과 중국군의 분쟁 발생하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일제가 초토화 작전을 벌이게 되자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 들여 중국 관내로 이동하게 됩니다.


1938년 중국 한커우에서는 중일전쟁을 계기로 중국 관내(만리장성이남)에서도 직접적인 침략으로 인해 조선인 무장 부대에대한 옹호여론이 형성되어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중국 관내 조선인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가 결성되게 됩니다. 조선의용대는 양쯔강 중류지역에서 공작활동을 주로 벌이게 됩니다.


이러한 조선의용대의 운영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은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를 위해서 공산당 지역이었던 화북으로 올라가 화북 지역의 무장군과 합쳐 조선의용군을 형성합니다. 공산당 지역이었으므로 당연하게도 공산당 팔로군과 연합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합니다.


대한민국에는 안타깝게도 직접전투로 단련된 조선의용군은 북한의 인민군의 주력 부대가 됩니다. 민족의 입장에서는 독립군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앞에서는 적군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임시정부는 4차례에 걸친 개헌을 하게되는데 1919년 9월의 1차개헌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대통령제를 채택합니다.


하지만 임시정부내의 노선갈등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에 소집되나 개조파와 창조파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게되고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해지게 됩니다. 이 후 1925년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2차개헌을 했다가 1927년 주석이 국무위원의 합의에 의해 정부를 운영하는 집단지도체제로 3차개헌을 하게됩니다. 1940년에는 김구를 주석으로하는 주석중심제로 4차개헌을 하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