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국가직 9급 한국사 8번 같이 보겠습니다.
8. 다음 자료에 나타난 통일신라시대의 신분층과 연관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그들의) 집에는 녹(綠)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이 3천 명이며, 비슷한 수의 갑병(甲兵)이 있다. 소, 말, 돼지는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기르다가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잡아먹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 주어 늘리는데,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아 부린다.
①관등 승진의 상한은 아찬까지였다.
②도당 유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③돌무지 덧널무덤을 묘제로 사용하였다.
④식읍,전장 등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였다.
해설
답은 4번이다.
신라에는 골품제도가 존재하였다 이 골품제도는 6세기 법흥왕부터 7세기까지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족장 세력을 대상으로 편제한 제도다.
골품제도는 골품에따라 관등에 제한을 두어서 6두품같은 경우엔 아찬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고 지방장관직(도독,사신)은 맡을수가 없었다.
6두품들은 실력으로 인정 받기위해서 노력한다.
나라밖에서는 당나라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해서 높은 합격률을 보여준다. 이중 대표적인 인물이 최치원(신라하대)이다. 당나라에서 토황소격문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고국인 신라에 돌아와 바른정치(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해보려하지만 신분적 제약에 막히게된다.
나라안에서는 통일 후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하는 왕과 결탁해 정적인 진골귀족에 대항한다. 대표적인물로는 설총(이두 정리,화왕계)과 강수(답설인귀서)가 있다. 또한 원성왕때 독서3품과 실시를 통해 실력으로 인정받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골품간에 강등은 가능해도 상승은 불가능했다. 또한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차별을 하였는데 골품별로 가옥,수레,의복 등 생활에 대하여 규제를 가하였다.
이에 반하여 진골귀족들은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법흥왕 설치)을 중심으로 전제왕권에 도전하며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을 했다. 금입택에 거주하며 노비와 사병을 소유했다. 이에 대해서 흥덕왕이 사치 금지령을 발표하나 실패한다.
고대사회인 신라사회는 이렇게 신분적으로 굉장히 막혀있는 사회였다. 중세의 고려는 이러한 벽을 일정 부분 극복하게 된다. 신라말의 변방세력이었던 6두품과 호족들이 다음세대의 주역인 문벌 귀족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도 한계가 있었는데 오로지 능력 위주인 과거시험으로만 사람을 뽑는게 아니라 외가쪽 심지어 처가쪽 가문을 통해서 음서로 최고관직까지 올라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것이 근세의 조선이다. 무신들과 권문세족에 밀려 변방세력이었던 사대부들이 다음 시대인 조선에서 권력을 잡게되면서 벽이 더욱 허물어졌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자는 일정관직이상 올라가기 힘들었고 반드시 과거에 응시를해야 최고 관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노비들과 여자들은 과거에 응시 할 수 없었고 법제적으로는 양인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어쨌든 역사는 더욱 발전하여 현대의 대한민국은 모든 20세이상의 국민들은 공무원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ㅎ
역사는 발전한다는 맥락에서 읽어주시고 국사에 관한 모든 내용이 이러한 관점에서 기술되어있다는 점을 인지해주시면 공부(암기)하는데 조금더 수월하리라 믿습니다.
(신라 귀족들이 술자리에서 벌주 마시게하며 놀던 주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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