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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국가직 한국사

2016 국가직 9급 한국사 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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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국가직 9급 한국사 7번 같이 볼게요

 

고대국가 백제에 대해서 공부한 내용을 상기하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7. (가)~(라)의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 역사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가) - 관등제를 정비하고 공복제를 도입하는 등 국가 통치체제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② (나) - 남쪽의 마한 잔여 세력을 정복하고, 수군을 정비하여 요서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③ (다) -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 일부 지역을 수복했으나 얼마 후 신라에게 빼앗겼다.

④ (라) - 복신과 도침등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사비성의 당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해설

답은 2번입니다.

 

문제를 풀기전에 고대국가의 특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맹왕국이 발전해나가면서 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게 됩니다. 중앙집권체제를 위해서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지게됩니다. 다시말해, 질서를 세우게 됩니다.

왕권강화를 위해서 왕위의 세습화를 시키고 기존 족장세력들을 중앙 귀족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또 이과정에서 율령의 반포를 통해 신분제적 질서를 세우고 관리들간에도 위아래 구분을 위하여 관등제를 정비합니다. 관리들간의 상하를 쉽게 알아보게 하도록 하기위해서 관복제정을 합니다.

 

이처럼 왕을 중심으로 한 질서는 고대국가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맹왕국의 특징으로 귀족회의제도가 남아있어서 왕권을 견제하게됩니다.

 

전 국민을 통합하기위해서 새로운 사상인 불교를 수용하게됩니다. 불교의 수용은 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왕은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현생에서 왕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왕은 귀족들을 포섭하는데 어쨌건 나보다는 덜하지만 너희들도 착한일을 했으므로 귀족으로 태어난게 아니냐라는 식으로 설득을 합니다.이렇게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모든세력을 통합하는것이 고대국가의 사상적 특징입니다.

 

나라를 통합해나가면서 고대국가들은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취를 억제하기위해 당의 수취제도를 본딴 합리적 수취제도를 시행합니다. 조세,공물,역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조선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내부적 정비를 통해 강해진 힘으로 고대국가들은 정복사업을 합니다. 특히,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삼국이 항쟁하게 됩니다. 시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들알고 계시겠지만 한강유역을 차지한쪽이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것을 토대로 백제의 역사를 보겠습니다.

백제는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십제로 건국하여 백제로 개칭을 하게됩니다. 온조왕은 설화에서 처럼 북쪽에서 내려온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돌무지무덤을 통해 확인됩니다.

 

3세기에 백제 고이왕은 한강유역에서 교류를 통해서 문화를 적극수용합니다. 법령을 공포하고 관등제를 정비하게 됩니다. 관등제를 정비합니다. 관등을 정비했으니 당연하게도 관복제도 정비해서 색깔로 관등을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중앙 집권토대를 만들게 됩니다. 또한 정복 사업도 벌이는데 북으로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고 남으로는 목지국을 병합하기 됩니다. 연맹왕국이던 마한의 중심국가이던 목지국을 밀어 냄으로써 백제는 마한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합니다.

 

4세기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더욱 강해지 중앙집권체제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남으로는 마한 완전정복하고 북으로는 황해도에서 고구려와 대결하여 고구려 고국원앙을 전사기킵니다 동으로는 가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해외로는 논란이 있긴하지만 요서 지방과 산동지방으로 진출하고 일본의 규수까지 진출합니다.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은 칠지도인데 왜왕에게 백제가 하사한 칼입니다.

백제의 일본에 대한 영향을 확인 할 수 있는 유물 칠지도

 

내부적으로 근초고왕은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동진(중국의 남조)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왜-가야-백제-동진을 잇는 무역 활동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신라말의 장보고의 청해진이 했던것과 비슷하네요.

문화적으로는 박사 고흥이 역사서 서기를 편찬합니다. 일본에 아직기를 통해 한자를 왕인을 통해 논어와 천자문을 전파합니다. (보통 나라가 전성기 일때 자국의 역사를 씁니다)

 

5세기가 되자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위기를 느낀 백제의 비유왕은 신롸와 동맹(433)을 결성합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여 북위에 국서를 보내지만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함락되어 전사하게 됩니다. (4세기 고국원앙의 죽음으로 백제와 고구려는 5세기에 관계가 좋지 못합니다) 수도를 빼앗기고 문주왕은 어쩔 수 없이 공주(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하지만 한강유역을 잃게 되면서 세력이 약화되고 무역도 침체를 겪게 됩니다.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하게 되고 귀족내부의 권력다툼이 발생하면서 왕권은 더욱 약화되게 됩니다. 동성왕은 신라(소지마립간)와의 관계를 결혼 동맹으로 격상시켜 고구려에 대비합니다

 

6세기 무령왕은 다시금 체제정비를 위해서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해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합니다. 외교적으로는 양(중국의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양직공도가 남아있습니다. 또한 무령왕 본인의 무덤은 벽돌 무덤입니다. (벽돌은 흙을 구워 돌을 만드는 방식으로 중국의 방식입니다) 일본에는 단양이,고안무 등의 5경 박사를 파견해줍니다.

무령왕릉입니다. 벽돌로 구워진게 보입니다.

 

백제 성왕은 백제 중흥을 위하여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538)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칩니다.

중앙은 22부를 설치하고 지방제도로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개편합니다.

사상적으로는 승려 겸익(율종)을 중용해서 국가의 사상적 토대확립을 위해 노력합니다.

외교적으로는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하고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경과 불상을 전파합니다.

정복사업으로는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잃고 관산성에서 패배해 성왕또한 전사하게 됩니다.

 

이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복신과 도침의 주류성과 임존성의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을 진행하고 왜 수군의 지원으로 백강(금강의 지류)입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배하면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남조와의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양직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