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국가직 9급 한국사 9번 같이 보겠습니다.
9.임진왜란 떄의 주요 전투를 벌어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ㄴ. 조선과 명나라 군대가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ㄷ.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의 대군을 맞아 격전 끝에 진주성을 지켜냈다.
ㄹ.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의 수군을 격퇴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①ㄱ→ㄴ→ㄷ→ㄹ
②ㄱ→ㄷ→ㄴ→ㄹ
③ㄹ→ㄴ→ㄷ→ㄱ
④ㄹ→ㄷ→ㄴ→ㄱ
해설
답은 4번이다.
임진왜란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를 묻는 문제이다.
조선은 200년간의 평화로 인해 국방력이 굉장히 약화 되었다. 그 이유는 군역(대립제, 방군수포제, 군적수포제)이 문란해진 상황 때문이었다. 따라서 군적에 등록된 인원보다 실제 군인은 더 적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평화상황으로 인해 군역의 요역화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제로도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욕심이 있었고 통일과정에서 무사들에게 지급할 봉토가 부족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히데요시는 무사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전쟁준비를 하게된다. 대의명분으로는 정명가도(명을 치러가니 길을 빌려달라)를 내세웠으나 히데요시는 이미 조선과의 전쟁을 염두해두고 세작들을 보내 조선을 염탐하고 조선과의 전쟁을 충분히 준비해뒀다. 히데요시의 조선점령 작전은 수륙병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육군으로 북상하면서 남해와 서해를 통해 물자를 조달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점령해 군량미를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하에 1592년 일본군은 부산포에 나타난다. 부산진에서 정발과 동래성의 송상현 등 부산의 관민들은 분전했으나 패배하게된다. 이때 조선은 제승방략 체제로 각 지역의 군인들을 요충지에 한 번에 모은 다음 중앙에서 지휘관을 내려보내 막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충주에서 적을 막을 계획을 세우고 총대장으로 북방에서 여진족을 물리친 명장인 신립을 내보내게 한다. 북방에서의 전투에 익숙한 신립은 기병을 내세워 평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려한다. 하지만 이는 패착이었다. 문경새재에서 좁은 산길을 통과하는 적을 매복해서 잡는 것이 적을 틀어막기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경새재를 지나며 조선군이 이곳을 막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하였다. 결국 신립의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하다시피하고 신립 또한 목숨을 잃는다. 서울까지 단숨에 뚫리게 된다. 선조는 신립의 패전소식을 듣고 바로 몽진을 떠나게 된다. 한양의 백성들은 도성을 버리고 떠나는 선조의 어가를 막아세웠으나 결국 선조는 무책임하게 도망가고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을 태우게 된다.(마치 한국전쟁에서 한강철교를 끊고 라디오로는 안심하라고 하며 도망간 이승만을 떠올리게한다.)
(동래성 전투도)
하지만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거제)에서 첫 승리를 하고 이어 사천(거북선 출전),당포,당항포,율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후 이순신의 수군은 임진란 3대 대첩인 한산도에서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을 펼쳐서 승리한다. 또한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해 승리하게 된다. 내륙에서는 전직관리, 양반, 승려, 농민들이 합심해 자신들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 의병들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군을 게릴라식으로 공격하고 관군과의 합동 전투를 통해 왜군을 괴롭히며 육지쪽 보급로를 차단한다. 히데요시의 전략인 해로를 통한 보급을 이순신이 막고 육지를 통한 보급을 의병들이 막게 되니 왜군들은 육지에서 승승장구하나 보급이 위험해지니 위협을 느끼게 된다.
선조는 비겁하게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나 명나라 측에서 거부한다. 이러한 와중에 명나라는 왜군이 명나라로 진군하기전에 조선에서 막겠다는 계획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다.(이여송 5만 명군) 명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황은 역전되기 시작한다. 평양성에서는 화포가 큰 위력을 발휘한다. 명군은 왜군을 얕잡아보고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빠르게 남하한다. 하지만 화포부대가 뒤쳐지기 시작했고 결국 벽제관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패퇴하게 된다. 벽제관에서 패배한 명군은 소극적으로 변하여 명군이 후퇴하게 된다. 한양탈환작전을 준비중이던 권율부대는 고립되게 된다. 하지만 행주산성(임란3대첩)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 권율의 부대는 승리한다. 그 결과 한양을 탈환하게 되고 왜군은 남쪽으로 퇴각하여 경상도 연안에 일본식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평양성 전투도)
(행주대첩 전투도)
이러한 와중에 명나라가 일본에 화의를 제의하게 된고 전황이 불리한 일본은 이에 응하게 된다. 하지만 도요토미의 지나친 요구(조선의 남쪽 4도를 할양요구 왕자의 볼모등)로 협상을 결렬된다. 잠시동안의 협상기동안 조선군은 훈련도감(포수, 사수, 살수로 이루어진 직업군대)를 정비하고 지방군대 조직인 속오군(양천혼성군 진관체제에 따라 정비, 진관체제는 제승방략과 다르게 지역방어를 위주로한 체제)을 정비하고 화포개량, 조총제작등 무기를 개발한다.
협상의 결렬로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정유재란 3대 대첩은 직산 전투, 명량 대첩, 노량 대첩이 있다. 직산 전투는 조명연합군이 직산에서 왜군의 북상을 막은 전투이다. 명량 대첩은 이순신 장군님이 울돌목에서 빠른 조류를 이용해서 단 13척의 배로 왜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노량 대첩은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이순신 장군님이 격퇴한 전투이다. 안타깝게도 노량전투에서 이순신 장군님은 적의 유탄에 맞아 돌아가시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비변사(전쟁중 임시기구)의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되어 상설 국정최고 합의기구가 되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인구가 감소하고 농촌이 황폐화 되었다. 또한 양안(토지대장)과 호적이 소실되게 되어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정부는 공명첩을 대량 발행하고 신분제가 더욱 동요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이몽학의 난이 발생한다.(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것을 다루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전주를 제외한 사고가 불타게 된다. 우리가 보는 조선왕조실록은 이 전주본을 다시 만들어진게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앞서 봤듯이 백성들이 경복궁을 불태우게 되고 불국사는 왜군에 의해 소실된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우는데 도공들을 끌고가면서 일본의 도자기는 발전하게 된다.
서적,활자,그림등 문화재를 일본은 이때도 약탈해간다.
또한 이황의 성리학이 일본에 전파 되게된다.(강항)
명나라는 요동을 지키던 군사를 조선에 파견하면서 요동지역에서 군사적 공백이 발생해 여진족이 성장할 빌미를 주게된다. 훗날 결국 이 여진족이 후금으로 성장하여 결국 산해관을 넘어서 중국대륙을 정복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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