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국가직 9급 한국사 19번 보겠습니다.
ㄱ. (가) - 왕 아래 대부, 박사 등의 직책이 있었다.
ㄴ. (가) - 고조선 지역에 한(漢)의 창해군이 설치되었다.
ㄷ. (나) -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며, 중계무역의 이득을 취하였다.
ㄹ. (나) -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분포를 통하여 통치지역을 알 수 있다.
① ㄱ, ㄷ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ㄴ, ㄹ
해설
답은 1번입니다.
고조선은 B.C 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해서 건국되었습니다.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여 국가를 형성하여 나갔습니다. 단군왕검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정일치(정치와 종교의 미분화)의 사회였습니다.
또한, 단군신화를 해석해서 보자면 고조선은 천손 사상 부족과 곰 토템 부족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국 시대의 제나라와 교역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였습니다. 왕을 칭할 정도로 왕권이 안정되어있는 사회였고
B.C 3c에는 왕위의 세습화(부왕-->준왕)를 이룹니다. 왕아래 상, 대부, 장군을 두었고 국가의 중대사를 왕과 상이 참가한 회의 에서 결정하였습니다.
성장하던 고조선은 B.C 3c초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략을 받아 서쪽땅을 잃게 됩니다. 이 즈음에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령지방에서 평양지방으로 옮겨간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까지의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므로 당연히 고조선의 강역을 알아보는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 거친무늬 거울등은 고조선의 강역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B.C 3c 중엽 중국이 진나라와 한나라에 의해 통일되는 과정에서 연, 제, 초 등의 고조선과 근접해 있는 나라에서 수만명의 동이계열의 지배층이 고조선으로 망명을 해왔습니다. 그 중에서 B.C 2c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 1천여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오는데 사료에 따르면 이들은 상투를 틀고 고조선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위만은 동이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박사에 명하고 서쪽 변방을 지키는 장군으로 임명을 했으나 위만은 군사를 돌려 수도 왕검성으로 들어가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위만조선은 철기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철제농기구를 사용하게 되어 생산력이 증대 되었습니다. 증대된 생산력 덕분에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주변지역(임둔, 진번)을 복속하여 세력을 확장시킵니다.
이 때 한강이남에는 진국(辰國)이 한(漢)과의 직접 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위만조선은 진국이 조선을 통해 중국과 무역하도록 해서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독점하게 됩니다.
이렇게 위만조선이 강국으로 성장해 나가자 한은 흉노와 위만조선이 동맹을 맺어 공격당하는것을 걱정했습니다. 이 떄 B.C 128년 고조선에 속해 있던 예국의 왕 남려가 28만명의 주민을 이끌고 한에 투항하는데 한은 이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고조선을 압박하려 하나 토착인의 저항으로 실패합니다.
한은 외교적으로 창해군을 살리기 위해 섭하를 사자로 냈으나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말을 듣지 않자 위만조선의 장수를 살해하고 한으로 돌아갑니다. 위만조선은 이에 분개하여 요동으로 군사를 보내 섭하를 살해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됩니다. 그래서 한무제는 수륙으로 군대를 보내 위만조선을 공격하나 패수에서 위만조선이 승리 합니다. 1년간의 항전중에 주화파인 성기가 살해됨으로써 왕검성이 함락되고 위만조선은 멸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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